이탈리안 아이콘, 알파로메오 110주년을 기념하며 Part 1

  • 기사입력 2020.08.05 18:07
  • 최종수정 2021.06.28 15:07
  • 기자명 모터매거진

알파로메오는 이탈리아의 아이콘이자 정신적 지주다. 이들이 없었다면 페라리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담은 알파로메오의 110년 여행이 마침내 시작된다. 

2020년 6월 24일은 이탈리아에 있어 기념비적인 날이다. 자동차 브랜드 알파로메오가 등장한 지 110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알파로메오는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며 페라리보다 먼저 강렬한 레드 색상을 사용했고, 행운의 네잎클로버 쿼드리폴리오(Quadrifoglio)와 함께 다양한 레이스를 누볐다. 페라리의 창립자인 ‘엔초 페라리(Enzo Ferraria)’도 알파로메오가 없었다면 그저 평범한 청년으로 여생을 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폴리를 누빈 프랑스인 

알파로메오가 창립된 것은 1910년 6월 24일이지만, 사실 역사는 그 이전부터 시작된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자전거 공장을 운영하던 ‘피에르 알렉산드레 다라크(Pierre Alexandre Darracq)’는 자동차 생산과 판매에 눈을 돌렸다. 당시 프랑스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둔 그는 수출에도 눈을 돌리는데, 이탈리아 수출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나폴리는 프랑스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그는 고민 끝에 1906년 12월에 생산 시설을 밀라노로 이전하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당시 이탈리아가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고 자동차 구매력이 낮았다는 것이다. 이를 간파하지 못한 다라크는 몇 년을 버티다가 1909년 말에 회사를 청산하기로 한다. 그 때 상무 이사로 일하던 ‘카발리에 우고 스텔라(Cavalier Ugo Stella)’가 회사의 잠재력을 확신하고 밀라노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공장을 인수한 뒤 200명 이상의 직원들을 재고용했다.

피아첸자의 측량사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도시 피아첸자(Piacenza)에 젊은 측량사가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주세페 메로시(Giuseppe Merosi). 그는 자동차에 관하여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었는데, 그의 능력을 알아본 ‘우고 스텔라’가 새로운 자동차를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다라크가 기존에 만들던 자동차보다 더 힘이 좋으면서 이탈리아 고객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취향에 따라 차체 커스텀이 가능한 자동차가 필요했다. 그는 밤낮으로 일하며 자동차를 만들어나갔다.

알파로메오의 브랜드를 사용하는 첫 번째 자동차인 24 HP가 등장한 것이 1909년인데, 브랜드보다 자동차가 먼저 등장한 몇 안 되는 사례일 것이다. 이 차는 당시에는 드문 형태의 모노블록 엔진을 탑재했으며, 배기량 4ℓ의 4기통 엔진은 최고출력 42마력을 발휘했다. C자 형태로 프레스 가공한 메탈 프레임은 코치 빌더(차체 커스텀 장인)들에게 인기가 높았으며, 다양한 토르페도 모델(B필러가 없고 차체 후면에 소프트톱을 얹는 형태의 컨버터블)과 리무진의 등장에 일조했다.

성능에 주목해서인지 당시로써는 시속 100km에 달하는 빠른 최고속력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델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주세페 메로시는 1911년에 이 모델을 한층 더 정밀하게 다듬은 24 HP 코르사(Corsa) 모델을 개발했다. 기존 모델보다 더 가벼우면서 출력도 높은 트랙션의 덩어리와도 같은 자동차였다. 오늘날 알파로메오가 만드는 스페셜 모델 GTA와 비슷한 개념이다. 알파로메오는 이 모델로 레이스에 뛰어들었고 1913년에 첫 승리를 거두었다.

레이스에 미치다 

신생 브랜드인 알파(A.L.F.A.)에게 있어(알파로메오가 된 것은 좀 더 후의 일이다) 레이스는 브랜드를 직접적으로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무대였다. 레이스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 알파는 1913년, 새로운 콘셉트의 엔진을 탑재한 자동차 40/60 HP를 출시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리코티 백작(Count Ricotti)과 전설의 코치 빌더 카스타냐(Castagna)가 힘을 합했다. 마치 당시의 공상과학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디자인을 가진 이 차는 당시 최고속력 시속 139km를 기록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알파가 가진 공장은 군수 시설로 바뀌지만, 이때 또 다른 기회가 생겼다. 탄약 및 비행기 엔진을 생산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조가 이루어지면서 미국에서 직접 구매한 최신 공작 기계와 장비가 들어온 것이다. 수백 명에 불과했던 직원이 1200명 이상으로 늘었고, 이탈리아 왕국의 상원 의원이었던 니콜라 로메오(Nicola Romeo)가 엔지니어링과 관련된 회사들을 사들이며 알파도 구매했다. 그는 알파에 자신의 성을 더해 브랜드를 ‘알파로메오’로 바꿨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자동차 개발이 계속 이어졌다. 1921년 11월 런런 모터쇼에 등장한 알파로메오 RL은 아마도 주세페 메로시의 최대 걸작일 것이다. 배기량 3ℓ의 6기통 엔진은 최고출력 56마력을 발휘했는데, 분리 가능한 헤드와 로커 암, 로드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시스템을 정밀하게 결합한 것이었다. 최고속력은 시속 110km에 불과했지만, 정밀한 제어가 가능해 레이스에서의 잠재력이 높았다. 1923년, RL의 코르사 모델이 등장하며 레이스 참가 준비가 완료됐다.

새로운 엔지니어와 전설의 모델 6C 

레이스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좋았지만, 이제 레이스 모델과 대량 생산 모델을 분리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 즈음에서 당시 레이서로 활약하고 있던 젊은 엔초 페라리가 이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엔지니어이자 디자이너인 비토리오 자노(Vittorio Jano)를 끌어들였다. 그는 혁신적인 기술을 자동차에 아낌없이 적용했고, 그가 개발한 GP P2 모델은 평균 속력 시속 158km 이상을 발휘하며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비토리오 자노는 1926년부터 알파로메오의 상품 개발을 담당했다. 그의 천재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모델이 바로 1929년에 등장한 6C인데, 비교적 단순한 구조와 정교한 엔지니어링을 결합한 모델이다. 기존에 알파로메오가 갖고 있던 6기통 엔진을 더욱 정밀하게 다듬고 발전시켰는데, 싱글 샤프트와 더블 샤프트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컴프레서를 넣거나 빼는 등 여러 가지 변칙으로 최고출력을 46마력부터 102마력까지 마음대로 조정했다.

엔진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대형 드럼을 사용하는 기계식 브레이크를 적용해 제동 성능을 추가했고, 프레스 방식으로 제조한 강철 프레임은 균형과 함께 견고함을 자랑했다. 스프링을 차체 외부에 장착해 무게 중심을 낮추고 연료 탱크의 위치도 바꿔 뒷바퀴의 그립력을 향상시켰다. 6C는 이후 독립식 서스펜션, 강성 확보를 위해 리벳 대신 용접을 적용한 차체 등으로 계속 발전했으며, 알파로메오의 상징인 핸들링 및 그립력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6C 1750 모델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영국 등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당시 이 모델의 이탈리아 내 판매 가격은 4만~6만 리라. 당시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을 고려했을 때 7년을 꼬박 모아야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0년 4월 13일, 유명한 레이스인 밀레 밀리아(Mille Miglia)에서 6C 1750 그란 스포츠 스파이더 자가토 모델이 평균 주행속력 시속 100km의 장벽을 깨며 1위를 차지했고 그 뒤로 3위까지 모두 6C 모델이 차지하며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전쟁의 상처를 잊게 만들다 

6C는 계속 발전했으며, 1939년에 출시한 6C 2500 모델은 텔레스코픽 방식의 쇽업소버를 결합한 리어 토션빔 서스펜션, 유압식 브레이크 등 당시의 최신 기술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성능은 더 높아져 최고속력 시속 170km를를 발휘했고, 레이스에서도 활약했다. 그리고 공장 전문 엔지니어였던 우고 고바토(Ugo Gobbato)가 공장 내 임무에 따른 비례 급여 등을 도입하며 생산 효율을 높였다. 일반적인 대량 생산은 아니지만 효율적인 생산이 이루어졌다.

2차 세계대전은 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이탈리아 군대의 요청에 따라 군수 물품을 생산해야 했고, 1943년과 44년에 공장이 폭격을 당하면서 심한 손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공장에 남은 것은 이전에 만들었던 6C 2500의 부품들이었고, 만들 수 있는 자동차는 한정되어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주변에 남은 것은 없었고, 근로자들과 엔지니어들은 공장 가동에 필요한 것들을 암시장에서 직접 사와야 했다.

6C는 여전히 코치빌더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바티스타 피닌파리나(Battista Pinin Farina)도 있었다. 그는 1946년에 자신이 만든 6C 커스텀 모델들 중 하나를 파리 모터쇼 무대로 가져가려 했지만, 패전국인 이탈리아에게는 자리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과감하게 낮에는 박물관인 그랑 팔레(Gran Palais)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밤에 가르니에 궁(Place de L’Opéra)으로 차를 가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6C의 마지막 모델인 6C 2500 SS 빌라 데스테(Villa d'Este)가 만들어졌다. 유명한 코치빌더인 ‘카로체리아 투어링 슈퍼레제라’에서 6C를 기반으로 만든 것인데, 20세기 자동차 예술의 걸작품을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모델이기도 하다. 단 36대만 제작되었기에 희소성도 높으며, 무엇보다 알파로메오의 마지막 프레임 보디 모델이기에 더더욱 인상적이다. 이 뒤로 알파로메오는 모노코크 보디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게 된다.

글 |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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