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

  • 기사입력 2017.08.11 22:59
  • 최종수정 2020.09.01 20:54
  • 기자명 모터매거진

BOXING FROG

아직도 키박스는 스티어링 휠 왼쪽에 위치하며 911의 실루엣은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하다. 역사 속에 역사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혼은 지금 포르쉐에 여전히 깃들어 있다.

글 | 안진욱

Ferdinand Porsche(1875~1950)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소문이 돈다. 그만큼 인류가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완벽주의의 결정체다. 새로운 기술로 물리적인 약점을 극복해 버리는 지능지수가 가장 높은 브랜드다. 구구단을 20단까지 외우고 푸른 피가 흐르는 독일인이 만든 장난감, 이것이 포르쉐다.

한 번 감염되면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포르쉐 바이러스. 악성 바이러스를 만드는 이 못된 집단의 시작은 8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엔 마페르스도르프(Maffersdorf)로 불리고 지금 체코의 북부 보헤미아의 브라티슬라비체(Vratislavice)에서 1875년 9월 3일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가 태어났다.

뛰어난 판금공이었던 안톤 포르쉐(Anton Porsche)의 셋째 아들이었다. 큰형이 아버지의 판금 작업장을 물려받아야 했으나 그는 1888년 작업 중 사고로 사망한다. 이로 인해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1889년부터 아버지 밑에서 판금 작업을 배우기 시작한다.

당시 14살이었던 페르디난트는 파이프나 나사보다 전기에 관심이 많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기계방적공장인 긴츠카이(Ginzkey)에 드나들게 된다. 긴츠카이는 그 지역뿐만 아니라 보헤미아 전체에서 가장 큰 기업으로 유명했다.

공장 안에는 약 250개의 기계식 베틀(명주, 모시, 삼베 등을 짜는 틀)이 ­­­부단히 움직이며, 담요나 양탄자를 생산했다. 몇 십 년이 지난 1920년대 이 공장에서 뉴욕에 있는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을 위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양탄자를 만들기도 했다.

페르디난트는 공장에 있는 최신식 전기 기계 설비에 완전히 매료된다. 그는 다락방서 홀로 전기 실험을 시작한다. 그중에 하나는 배터리 전구가 달린 그의 스케이트다. 마을에 있는 꽁꽁 언 호수 위에서 이 스케이트를 신은 그의 모습은 독특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이러한 행동을 괴짜 취급하면서 전기에 관한 실험을 금지시켰다. 반면 어머니는 아들이 가진 지식에 대한 목마름과 호기심을 이해했다.

그녀는 남편을 설득해 페르디난트가 집에서 가까운 라이헨베르크(Reichenberg, 현재 Liberec)의 국립 기술학교에서 저녁 시간에라도 전기 기술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페르디난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893년 그는 집에 전등과 전기 초인종을 설치해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그의 아버지도 페르디난트를 자랑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페르디난트는 전기회사연합에 기술자로 취직하면서 마페르스도르프를 떠나 비엔나로 간다. 가업은 동생인 오스카가 물려받게 된다.

6년 후인 1899년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마차 제작 회사 ‘로너(Lohner)’로 이직했다. 이곳에서 전기 기술에 능했던 페르디난트는 새로운 차를 발명한다. 이는 액슬에 모터가 장착된 자동차로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이면서 동시에 세계 최초의 사륜구동 차다.

1902년 페르디난트는 이 하이브리드 모델인 로너 포르쉐 믹스테(Lohner-Porsche Mixte)를 타고 고향으로 금의환향한다. 1906년 페르디난트는 로너를 떠나 비엔나의 ‘오스트로 다임러’에 수석 설계사로 취임한다.

1923년 페르디난트는 스투트가르트 건축가인 파울 보나츠(Paul Bonatz)와 프리드리히 오이겐 숄러(Friedrich Eugen Scholer)의 설계에 따라 포이어바흐 벡 48번지에 ‘포르쉐 빌라’를 세웠다. 이 빌라는 오늘날 포르쉐가의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1931년 4월 25일에 스투트가르트의 크로넨슈트라세 24번지에 포르쉐 엔지니어링 오피스(Porsche Engineering Office)를 설립한다. 20명의 직원과 그의 아들 페리 포르쉐(Ferry Porsche)가 근무했으며 이 건물 역시 지금까지 존재한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는 경제부흥을 위해 자동차산업에 힘을 실고 있던 터라 역량 있는 페르디난트를 호출했다. 히틀러가 원하는 차의 조건이 있었다. 성인 두 명과 아이 두세 명이 탈 수 있어야 하며 7ℓ의 연료로 100㎞를 갈 수 있고 가격은 1000마르크 보다 낮아야 했다.

결국 페르디난트는 1936년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4기통 수평대향 1.1ℓ 엔진을 얹힌 프로토타입은 26.5마력으로 최고시속 98km의 성능을 보였다. 간단한 구조와 우수한 내구성이 장점이었다. 특히 후면에 위치한 엔진과 후륜구동의 RR방식은 나중에 포르쉐가 설계한 차들의 시초가 됐다.

히틀러는 이 차를 보자마자 KDF(Kraft durch Freude : 기쁨의 힘)라 불렀다. 반면 페르디난트는 이 차를 폭스바겐(Volkswagen : 국민차)이라 불렀다. 당시 뉴욕타임즈에서 이 차를 ‘비틀(Beetle : 딱정벌레)’로 표현하면서 지금까지 비틀로 불리고 있다.

출시와 동시에 폭발적인 판매고를 올렸고 이 수익은 고스란히 전쟁 자금으로 사용됐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비틀은 생산이 중단되고 그 동안 만들어 두었던 차들은 전쟁에 이용됐다.

이어 히틀러는 페르디난트에게 군용 탱크를 개발해 달라고 주문한다. 타이거Ⅰ, 타이거Ⅱ, 그리고 엘레펀트(Elefant) 등 유명한 탱크들이 바로 페르디난트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차와 탱크를 군수물자로 지원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에 머물던 페르디난트는 전범으로 체포되고 약 20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수장의 공백으로 회사는 아들 페리가 이끌었다.

1948년 6월 8일, 포르쉐의 첫 번째 프로토타입 ‘356-001’이 도로 인증 및 승인을 받았다. 페리는 “아무리 내가 꿈꾸던 차를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만들기로 했다”라고 개발 배경을 밝혔다. 이어 1949년 석방된 페르디난트는 다시 자동차에 대한 열정을 피우며 포르쉐 이름 최초로 사용한 ‘포르쉐 356’을 완성하지만 이듬해인 1950년 1월 30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자동차 업계의 큰 별이 졌다.

슬픔을 뒤로 한 채 포르쉐는 앞으로 달렸다. 전설적인 모델들을 줄곧 출시하고 모터스포츠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으며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했다. 거기에 ‘형태는 기능에 따르다’라는 디자인 신조 덕분에 세월이 지나도 촌스러워 보이지 않는 것이 매력적이다.

카이엔과 파나메라와 같은 외도를 할 때도 우리를 실망시킨 적은 결코 없다. 가장 믿음직스러운 스포츠카를 만드는 브랜드 포르쉐. 지금도 이 독일산 스포츠카를 갖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 기자 역시 마찬가지.

BADGE STORY

1952년 페리 포르쉐가 미국의 첫 포르쉐 수입업자인 맥스 호프만과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던 중이었다. 호프만은 “모든 유명한 자동차들은 배지가 있는데, 포르쉐에는 왜 없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페리가 즉석에서 냅킨에 그린 것이 포르쉐 배지의 탄생이다.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문장 안에 스투트가르트의 문장 검정말을 담았다. 페리가 독일로 돌아온 뒤, 배지가 다듬어지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배지가 도시와 연방정부로부터 승인되고 1953년부터 포르쉐 모델에 부착되기 시작했다.

GLORY OF MOTOR SPORTS

3만회 이상 우승 트로피를 수집한 포르쉐는 1951년 르망 대회를 통해 레이싱에 입문했다. 356 SL 쿠페로 출전해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 1970년과 1971년에 917 쿠페로 다시 참가하며 우승을 차지한다. 또한 타르가 플로리오 대회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56년 550A 스파이더로 첫 국제 메이저 대회 우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2위 보다 15분이나 앞서 결승점에 도착한 기록이다. 트랙에서 뿐만 아니라 비포장에서도 포르쉐는 강했다. 1968년에 몬테 카를로 랠리에서 911 T로 우승, 1984년 911 카레라 4×4 모델로 스포츠카 최초로 파리-다카르 랠리 우승했다. 1986년에는 1만1000km를 주행하는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1위로 경기를 마쳤다.

최근 우승은 2017 르망 24시 클래식이다. 포르쉐는 6월 17일 대회 3연패 및 통산 19번째 종합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포르쉐 팀의 경기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얼 밤버(Earl Bamber, 뉴질랜드), 티모 베른하르트(Timo Bernhard, 독일), 브랜든 하틀리(Brendon Hartley, 뉴질랜드)가 운전하는 포르쉐 919 하이브리드의 프런트 액슬 드라이브 샤프트에 문제가 생겨 1시간 정도 수리가 진행되었다.

포르쉐 팀은 선두보다 18 바퀴나 뒤처진 상황에서 다시 경기에 복귀, 종합 순위 56위부터 선두까지 추월하는 압도적인 실력을 보였다.

MERCHANDISE

포르쉐와 리모와의 콜라보레이션

엄마! 아니 사장님 이거…

포르쉐 노트라 할지라도 음악을 이기긴 힘들다

조기교육으로 훗날 포르쉐를 타길…

이 정도는 되어야 책 읽을 맛이 나지

내차 키에 걸어 주문을 걸자. 포르쉐 타고 싶어요!

911 HERITAGE

페리 포르쉐의 아들인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는 불과 24세의 나이에 911을 탄생시켰다. 196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처음 발표된 911은 원래 901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었으나, 푸조와의 저작권 문제로 0이 1로 대체됐다. 포르쉐 359의 후속 모델인 911은 페리가 주문한 원초적인 사운드와 안락함, 그리고 골프 장비를 실을 수 있는 적재공간을 갖췄다. 첫 등장 이후 지금까지 2+2 시트를 갖추고 6기통 수평대향 엔진을 리어 액슬 뒤에 얹히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911 뒤에 붙는 카레라(Carrera)는 스페인어로 레이스를 뜻한다.

HALL OF FAME

959

6기통 2.8ℓ 트윈터보 엔진은 최고출력 450마력, 최대토크 51.0kg·m의 파워를 자랑했다. 사륜구동 시스템을 탑재해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3.7초 만에 마치며 최고시속은 315km에 달한다. 폭발적인 성능으로 슈퍼카 세계를 휩쓸고 다녔던 기념비적인 모델이다. 959에 충격 받은 페라리가 제작한 모델이 F40이다.

993

1993년 등장한 993은 마지막 공랭식 911이다. 허스키한 음색이 정점에 올라와 있던 모델이다. 이후 996 세대부터 차체가 비약적으로 커졌기 때문에 가장 911다운 모델로 여겨진다. 911에 처음으로 6단 수동변속기를 장착한 모델이기도 한 993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높은 몸값을 자랑하고 있다.

CARERRA GT

자동차 마니아들의 영웅, 폴 워커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모델이다. 포르쉐 역대 모델 중 가장 슈퍼카스러운 외모를 지녔다. V10 5.7ℓ 엔진은 최고출력 612마력 최고시속 330km, 0→시속 100km은 3.9초, 최고시속은 330km다. 귀신이 우는 듯한 하이톤 배기 사운드가 매력적이며 다루기가 쉽지 않아 사나이들의 도전 욕구를 촉진시켰다.

997 GT3 RS

역대 911 중 가장 서킷과 잘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다. 트랙데이를 위한 스포츠카가 아닌 공도주행이 가능한 레이스카다. 거대한 리어윙과 롤케이지만 보더라도 이 녀석의 성격을 알 수 있다. 991 GT3 RS로 진화하면서 유명 서킷의 간판을 깨고 있지만 짧은 휠베이스와 수동변속기 조합의 997 GT3 RS는 보통 남자들이 접근조차 하질 못했다.

918 SPYDER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포르쉐 정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술이 담겨있고 918대 한정 생산했다. 파워유닛은 V8 4.6ℓ 엔진과 두 개의 전기모터의 조합이다. 887마력의 힘은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2.8초 만에 끝내준다. 최고시속은 350km이며 녹색지옥 뉘르부르크링을 6분대로 주파할 수 있는 머신 중의 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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