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ICT THE KING

  • 기사입력 2018.05.07 11:45
  • 기자명 모터매거진

한동안 평화로웠다. 이제 위에서 내려오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온다. 왕관을 뺏으려는 자들의 공격이 거세다.

글 | 안진욱 사진 | 최재혁

세상에 SUV만을 만드는 회사는 랜드로버와 지프 둘 뿐이다. 그렇다고 두 브랜드가 서로 경쟁사는 아니다. 가격대도 다르고 장르도 살짝 다르다. 지금 지프는 마음 편하지만 랜드로버는 걱정거리가 많다. 프리미엄 SUV의 상징이지만 수많은 브랜드들이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이제는 ‘사막의 롤스로이스’란 별명은 사용할 수도 없다. 진짜 롤스로이스 SUV가 곧 나올 예정이니까. 게다가 벤틀리에서도 벤테이가를 선보였고 람보르기니도 우르스를 출시했다. 하이엔드 브랜드가 랜드로버를 위에서 누르려 하고 있다.

더구나 같은 클래스의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들은 높은 완성도와 탄탄한 주행성능, 거기에 조금 더 부담 없는 가격으로 랜드로버를 더욱 코너로 몰고 있다. 수비적으로 대처해서는 답이 없다. 랜드로버의 상류층 레인지로버가 이들을 무찌를 힘을 가져야만 한다.

과거의 명성으로 계속 소비자들을 유혹할 수 없다. 또한 강남에 나 빼고 모두 타고 다니지만, 이들이 브랜드에 충성도가 높다고 판단할 수도 없다. 이들의 앞날을 점쳐 본다. 긴말 필요 없다.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레인지로버와 레인지로버 스포츠를 만났다.

새차를 타는 영광을 누렸다. 내가 만약에, 정말 만약에 레인지로버를 산다면 이 기분이 들겠지. 둘 중 레인지로버에 먼저 올라탔다. 단지 8기통 디젤 엔진으로 6기통 디젤 엔진의 레인지로버 스포츠를 따돌리고 싶었다. 그런데 거리를 벌리지 못한다.

참고로 V8 4.4ℓ 디젤 엔진은 최고출력 339마력, 최대토크 75.5kg·m의 힘을 네 바퀴로 전달한다.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6.9초다. 레인지로버 스포츠에 달려있는 V6 3.0ℓ 디젤 엔진은 최고출력 306마력, 최대토크 71.4kg·m의 파워를 생산한다. 0→시속 100km는 7.3초.

배기량 대비 힘의 차이가 크지 않다. 또한 공차중량은 레인지로버 스포츠가 가볍다. 변속기도 ZF 8단 자동으로 같다. 실제로 레인지로버가 레인지로버 스포츠로부터 도망갈 수 없었다. 이 녀석이 안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저 놈이 빠른 것 같다.

가속페달을 밟을 때마다 차가 들썩거리며 엄청난 토크가 바퀴로 전해지는 느낌이 생생하니까. 저회전영역에서 최대토크가 터진다고 했지만 가솔린 엔진을 모는 것처럼 엔진회전수를 살짝 띄워놓고 달리는 것이 훨씬 힘찼다.

레인지로버로 스포츠 주행을 하는 오너는 흔치 않겠지만 8기통 디젤 엔진은 ‘더 빨리!’를 유도한다. 고속도로에서도 힘은 남아돈다. 고속안정감은 지상고를 감안하면 준수하다. 비현실적인 시트포지션 때문에 살짝 불안한 기분이 들뿐, 실제로 섀시와 서스펜션은 고속에서의 구름 저항과 공기를 잘 다스린다.

브레이크 성능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이렇게 무거운 차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 노즈다이브 현상이다. 다행히 크지 않다. 브레이크스티어도 잘 억제되어 있어 마음 놓고 제동을 걸 수 있다.

서스펜션은 생각보다 단단하다. 물렁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급격한 차선 변경에도 차체가 크게 요동치지 않는다. 프런트에 더블 위시본 타입, 리어에 멀티링크 타입, 그리고 댐퍼는 공기로 채워놓았다. 이러한 세팅으로 손해 보는 부분이 있었다.

뒷좌석의 승차감이 조금 불편하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넓은 공간을 제공하지만 노면의 충격이 탑승객에게 전해진다. 물론 SUV 중에서는 단연 최고수준의 승차감이다. 허나 레인지로버의 라이벌이라 말하는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와는 물리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 감각을 그대로 가지고 레인지로버 스포츠에 탔다. 이름에 스포츠가 들어간 것만으로도 기대가 된다. 우선 스티어링 휠과 시트로 전해지는 진동은 8기통과 비슷한 수준이다. 오히려 6기통에서의 떨림이 덜 한 느낌도 받았다. 스로틀이 열리는 순간 형보다 빠릿빠릿한 반응을 보인다.

출력이 낮지만 훨씬 파워풀한 주행질감이다. 고속도로에서도 꽤나 달리는 녀석들을 쉽게 추월할 수 있다. 고속안정감도 레인지로버보다 더 훌륭하다. 실제 크기에서 큰 차이가 없지만 레인지로버는 부담스러운 덩치가 운전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레인지로버 스포츠는 그렇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든다.

스티어링 휠을 이리저리 휘저어 봐도 불안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주행안정화장치가 개입하는 일이 적을 만큼 괜찮은 밸런스다. 코너에서 터무니없는 속도까지 낮출 필요 없다. 보통의 세단보다 끈적끈적하게 코너 라인을 그린다.

언더스티어 현상이 크지 않아 진입 속도만 적절하게 조절한다면 복합 코너에서도 거동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탄탄한 하체 덕분이다. 승차감은 레인지로버보다 더 단단하지만 독일산 SUV들에 비해서는 여전히 부드럽다. 허나 이 정도 세팅이 운전자를 과감하게 만든다. 브레이크 시스템은 출력과 중량을 다스리기에 충분하다. 고속에서 강한 제동이 이어져도 지치지 않으니 믿음직스럽다.

신나게 달린 후 촬영 장소에 도착했다. 물가에 오니니 괜히 이 둘을 담가보고 싶다. 오늘 두 모델에는 오프로드를 거뜬히 주파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전자동 지형반응 시스템 2(Terrain Response 2)가 탑재되었다. 현재 주행 조건을 분석하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지형 프로그램을 자동으로 선택해준다.

혹은 운전자가 직접 선택할 수도 있다. 일반, 풀/자갈/눈, 진흙, 모래, 암벽, 자동 중. 서스펜션의 높이, 엔진반응, 트랙션 컨트롤 개입 등을 최적화해 어떠한 길에서도 당황할 일이 없다. 이를 믿고 레인지로버로 물보라를 만든다. 실제 오너가 이 고급 SUV로 이런 장난을 치지는 않겠지만 재밌다. 흙에 빠지더라도 탈출이 보장되니 마음 놓고 물놀이를 했다.

포토그래퍼가 이미지컷을 촬영하고 있을 때 새롭게 바뀐 부분을 찾아본다. 단박에 변화가 느껴지는 것은 레인지로버 스포츠다. 프런트 범퍼에 SVR처럼 공기흡입구를 시원스레 뚫어 공격적인 분위기를 완성했다. 리어 범퍼에 머플러 커터를 깔끔하게 매립한 것도 페이스리프트의 흔적이다.

또한 두 대 모두 눈빛이 더욱 강렬하게 변했다. 스모키 메이크업으로 ‘벨라’스러워 졌다. 뿐만 아니라 실내에서도 벨라스러워진 부분이 있다. 바로 공조기 컨트롤러가 터치식 디스플레이로 대체됐다. 보기에는 근사하지만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며 주행 중에 작동하기에는 불편하다. 지문이 남는 것도 아쉽다.

그 외에 바뀐 점은 별로 없다. 오디오 시스템도 여전히 메리디안이 달렸다. 과거에 느꼈던 소름 끼치는 감동이 줄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오디오 시스템은 볼보의 바워스 앤 윌킨스이며 그 다음이 랜드로버의 메리디안이었다.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면서 스피커의 원가를 낮추지 않았을 것인데 무슨 이유로 예전의 성능을 못 느끼는 것일까?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다른 브랜드의 오디오시스템들의 성능이 전반적으로 올라가 독보적인 맛이 희석되었다. 이퀄라이징을 이리저리 만져봐도 내 귀에 맞는 코드를 찾기 힘들다. 물론 여전히 근사한 음악 감상실인 것은 분명하다.

음악을 들으며 생산적인 고독을 씹어본다. 갑자기 내 통장에 ‘0’이 몇 개 더 붙어서 레인지로버를 산다면 어떤 것을 고를까? 레인지로버를 산다면 5.0ℓ 가솔린 엔진과 오토바이오그래피 트림을 고를 것이다. 타보니 8기통이라도 디젤 엔진은 그냥 디젤 엔진이다. 우아한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움직임이다.

둔탁하지 않게, 그리고 부드럽게 차를 끌어줄 파워유닛이 필요하다. 이렇게 나만의 레인지로버를 완성하니 가격이 2억을 훌쩍 넘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SUV를 타는 자부심에 이 값을 지불하는 것인데 이쯤 되면 앞으로 출시될 V8 벤테이가 가격이 궁금해진다.

오히려 레인지로버 스포츠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취향이겠지만 외모도 형보다 더 예쁘고 가격도 저렴하다. 무엇보다 레인지로버 배지를 가질 수 있다. 6기통 3.0ℓ 디젤 엔진은 파워와 효율이 만족스럽고 주행감성도 근사하다.

때문에 레인지로버가 ‘끝판왕 SUV’란 타이틀을 빼앗기더라도 독일산 SUV들이 들이댈 때 레인지로버 스포츠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페이스리프트를 거쳤지만 이제 출시한지도 꽤 지났다. 다음 세대 레인지로버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가 중요하다.

위기의 레인지로버는 SUV 왕의 품격과 자세를 갖춘 채 귀환해야할 것이고 레인지로버 스포츠는 더욱 다이내믹한 모습으로 온다면 그동안 쌓아 놓은 브랜드 명성을 충분히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SPECIFICATION _ RANGE ROVER

길이×너비×높이 5000×1983×1869mm | 휠베이스 2922mm | 무게 2650kg | 엔진형식 8기통, 디젤

배기량 4367cc | 최고출력 339ps | 최대토크 ​​​75.5kg·m | 변속기 8단 자동 | 구동방식 AWD

서스펜션 (앞)더블 위시본, (뒤)멀티링크 | 타이어 (모두)275/45 R 21 | 0→시속 100km 6.9초

최고속도 218km/h | 복합연비 8.0km/ℓ | CO₂ 배출량 248g/km | 가격 1억8750만원

SPECIFICATION _ RANGE ROVER SPORT

길이×너비×높이 4879×1983×1803mm | 휠베이스 2923mm | 무게 2395kg | 엔진형식 6기통, 디젤

배기량 2993cc | 최고출력 306ps | 최대토크 ​​​71.4kg·m | 변속기 8단 자동 | 구동방식 AWD

서스펜션 (앞)더블 위시본, (뒤)멀티링크 | 타이어 (모두)275/45 R 21 | 0→시속 100km 7.3초

최고속도 225km/h | 복합연비 10.7km/ℓ | CO₂ 배출량 181g/km | 가격 1억553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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