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 488 스파이더

  • 기사입력 2017.07.10 21:29
  • 최종수정 2020.09.01 20:25
  • 기자명 모터매거진

JOYFUL TOY

하나면 된다. 근사한 외관으로 시선을 즐길 수 있다. 프런트 펜더에 방패 배지가 박혀있다. 볼 품 없는 운전 실력을 감춰주면서 로켓처럼 쏠 수 있다. 데일리카로도 문제없다. 무엇보다 14초 만에 세상을 열 수 있다.

글 | 안진욱

사진 | Chris.C

고등학교 시절 책상에 두 개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하나는 나의 첫사랑 손예진. 친구 녀석이 영화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에서 근사한 수트를 입고 통역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을 구해줬다. 또 하나는 페라리 360 모데나였다.

보디 컬러가 적용된 헤드램프를 제외하면 자동차공학도를 꿈꾸던 고등학생에게는 완벽에 가까운 디자인이었다. 지금도 집 지하주차장에서 가끔 볼 때면 설렌다.

얼마나 좋아했으면 연료탱크 크기가 95ℓ인 것을 보고 놀랐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십수 년이 지났지만 ‘미샤’나 페라리 매장을 지날 때 발걸음이 멈춰지는 것은 여전하다.

세상이 영화처럼 보인다. 강한 햇살에도 얼굴이 찌푸려지지 않는다. 얌체 운전자들이 득실거리는 꽉 막힌 올림픽대로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룸미러에 비치는 내 모습이 근사하다. 이것은 페리리 효과다. 노란색 원 안에 말이 서 있더라도 긴장할 필요 없다.

당신의 오만한 운전 실력을 자비롭게 포용해 주니깐. 밟는대로 나가지 않는다. 밟은 것보다 더 나간다. 카본으로 감싼 패들시프트로 오케스트라가 아닌 록밴드를 지휘할 수 있다. 거기에 뚜껑까지 벗어 던질 수 있다.

페라리 488 스파이더로 서울을 벗어나고 있다. 비록 옆자리에 예진이는 없지만 나의 로망 360 모데나의 후손을 타고 있는 것만으로 혈기가 왕성해진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명시해야할 것이 있다. 기자는 차체강성을 손해보는 오픈톱 모델을 선호하지 않는다. 또한 페라리를 좋아하지만 과급기를 단 순간부터 페라리는 기자의 마음에서 멀어진 상태다. 그런 기자가 터빈 두발이 달린 오픈톱 페라리를 타고 있는 것이다.

우선 사운드가 가장 궁금했다. 분명 자연흡기 엔진보다 톤은 낮다. 그렇지만 답답하지 않다. 고회전 영역으로 진입하더라도 먹먹함 없이 쭉쭉 잘 뻗어 준다.

터빈으로 배기가스를 되새김질을 하는 것치고는 잘해냈다. 음색에 아쉬움은 없다. 스로틀이 닫힐 때 터지는 백프레셔만 들려줬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

Turbo? Fine!

달리기 실력은? 운전자가 원하는 위치에 차체가 옮겨져 있다. 순간이동을 하지만 폭발적으로 튀어나간다고 느끼기는 힘들다. 기를 모았다가 튀어나가는 보편적인 터보차가 아니다. 임펠러가 도는 소리가 아니면 터보차라고 느끼기 힘들 정도로 자연흡기 엔진처럼 마일드하게 차를 이끈다.

V8 3.9ℓ 직분사 엔진(F154 CB)에 트윈스크롤 볼베어링 타입 터빈 두 발을 달았다. 반으로 나눠 계산해보자. 4기통 2.0ℓ 엔진에 트윈스크롤 볼베어링 타입 터빈 하나를 달더라도 터보랙을 느끼기 힘들다.

심지어 트윈스크롤 볼베어링 터빈은 이미 순발력이 좋음에도 재료를 티타늄-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해 회전저항까지 낮췄으니 더 이상 터빈이 페라리의 아킬레스건은 아니다. 여하튼 이러한 유닛 두 대가 하나로 합쳐졌고 그 작업자가 페라리라면 타보지 않고 터보랙은 거의 없을 거라고 추측했다.

최고출력은 8000rpm에서 670마력, 최대토크는 3000rpm에서 77.5kg·m를 터트린다. 458 이탈리아 엔진과 비교해서 회전수를 낮게 사용하는 것 같지만 한가닥 하는 자연흡기 엔진보다도 피스톤이 빨리 움직인다. 실제로 가속 느낌이 자연흡기에 가깝다. 터보랙 없이 엔진응답성이 빠르다.

페라리는 터보차저로 자신의 콘크리트 지지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했는지 잘 준비했다. 저회전 영역에서 폭발적인 토크로 차체를 튕겨주고 고속으로 갈수록 출력으로 끈기 있게 속도를 붙여준다.

농익은 게트락 7단 듀얼 클러치 변속기는 엔진의 장단을 잘 맞춰준다. 458 이탈리아의 흥행 1등 공신은 이 유닛 때문이 아니었는가. 분명 진화했고 완성도가 높아졌다. 이렇게 빠른 변속 속도는 그란투리스모 게임에서만 가능한 줄 알았다.

덕분에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3.0초 만에 끝낼 수 있다. 무자비한 다운시프트에도 클러치에 걸리는 부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티어링 휠에 위치한 rpm 게이지에 빨간 LED를 채우면서 변속하는 재미는 태어나서 한 번쯤은 겪어봐야한다. 칼럼에 붙어 있는 패들은 조작감이 훌륭하며 스티어링 휠과의 거리도 알맞다.

오른쪽 패들을 몇 번만 당기면 순식간에 시속 200km, 그리고 시속 300km까지 쉽게 점령한다. 강력한 파워트레인 덕도 있지만 훌륭한 주행 안정감 때문에 운전자가 과감하게 가속페달을 밟을 수 있다. 더 이상 유튜브에서 페라리 사고 영상을 보면서 고소해하기 힘들 것 같다.

서스펜션 세팅은 페라리가 F1 개근상을 받은 흔적을 볼 수 있다. 정말 전천후다. 자기장을 이용해 노면을 훑는 댐퍼는 승차감을 살리면서 롤링은 잠재운다. 말은 쉽지만 이것을 잘 해낸 하체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488 스파이더의 하체는 하이엔드 클래스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준다. 스프링 레이트가 낮지만 노면 상태에 상관없이 트랙션을 확보한다.

골격 자체 즉, 섀시 밸런스가 좋다. 고출력을 다스리기 위한 준비가 탄탄하다. 오픈 에어링을 즐기는 대가로 GTB보다 155kg이 더해졌지만 체감하기는 어렵다.

차체 강성이 낮아서 오는 아쉬움이 없다. 복합코너를 통과하더라도 섀시가 엉키는 법이 없다. 한쪽으로 치우쳤던 횡중력을 반대쪽으로 다시 보내는 리듬이 좋다. 전자식 디퍼렌셜의 판단 속도도 빠르다.

ESP의 개입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치고 빠진다. 거의 개입하질 않는다.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가 이미 안정감 있게 세팅되어 있기 때문에 소프트웨어가 할 일이 딱히 없다. 마네티노 스위치를 레이스 모드 이상 올리더라도 무섭지 않다.

코너를 탈출할 때 스로틀을 일찍 열어 뒤가 흐르게 만든 후 교정하기 쉽다. 촐싹거리지 않고 여유 있게 카운터 스티어를 가져가도 늦지 않는다.

솔직히 코너링 한계는 모르겠다. 극상의 그립으로 공도에서 한계점을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타이어는 피렐리 피제로다. 물론 좋은 스포츠 타이어지만 670마력에 어울리는 피렐리 트로페오 R이나 미쉐린 파일럿 스포츠 컵2처럼 하드코어 타이어는 아니다.

허나 488 스파이더는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신발 탓을 하지 않았다. 나이키 축구화를 신은 우리보다 고무신을 신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더 나은 것처럼. 또한 슈퍼카에 걸맞게 무게중심이 노면에 닿아있는 느낌이다.

엔진은 드라이섬프 윤활 방식인데 기능도 기능이지만 가장 무거운 엔진의 위치를 최대한 낮췄으니 말이다. 이러한 것들이 모여 아름다운 코너 라인을 그린다. 뉴트럴 스티어다.

마그네슘으로 만든 20인치 휠 안에 프링글스통 만한 브레이크 캘리퍼가 자리한다. 라페라리에서 가져온 카본세라믹 브레이크 시스템은 파워트레인을 채찍질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노즈다이브와 브레이크스티어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고속에서의 강한 제동이 연거푸 들어가더라도 지치지 않는다.

단 주의해야할 점은 있다. 카본세라믹 디스크 로터 특성상 열이 어느 정도 올라와 있어야 제 성능이 나온다. 브레이크 페달의 답력은 강하다. 때문에 미세하게 브레이크 컨트롤을 하거나 왼발 브레이킹에 용이하다.

Eye Catcher

키미 라이코넨으로 빙의해서 488 스파이더를 괴롭혔다. 이제 한 숨 쉬어가기 위해 루프를 열어본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두 조각의 지붕은 14초 만에 세상을 보여준다. 미드십 하드톱은 페라리가 세계 최초다. 어느 메이커든지 쓸려면 쓰라며 사나이답게 특허도 내지 않았다.

시속 45km에서도 작동가능하다. 루프를 열고 달려도 실내로 바람이 휘몰아치지 않는다. 리어윈도를 윈드 디플렉터로 사용한다. 이것은 488 스파이더가 이성에게서 높은 점수를 딸 수 있게 하는 아이템이다.

루프를 열지 않고 리어윈도만을 내릴 수 있어 비오는 날에도 페라리 사운드와 음악을 캐빈룸을 채우는 낭만을 선사한다. 둘이 알콩달콩하는 장면 주변에는 많은 갤러리가 있다.

운전자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다. 당신보다 488 스파이더가 훨씬 잘생겼기 때문이다. 색상도 블루 코르사도 사대주의가 강한 기자 마음에 쏙 든다. 비버리힐즈 주민들은 푸른빛에 베이지 색상 조합을 좋아하니깐 기자도 좋다.

오픈톱 모델이지만 쿠페와 비교해 외관에서 전혀 손해 보지 않았다. 납작한 자세와 비현실적인 실루엣을 자랑한다. 보닛을 따라 수놓아진 LED 헤드램프와 코끼리 코처럼 모아지는 보닛 라인은 숨 막힌다. 458 스페치알레에서 보여줬던 프런트 범퍼를 통해 보닛으로 이어지는 공기통로를 만들어 놨다.

다운포스를 위한 것이다. 고속에서 프런트 그립을 놓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장치가 있어서다. 페라리 마라넬로 공장에 오답노트가 있다는 증거다.

옆모습의 이기적인 캐릭터 라인에 엄마 장롱에서 꺼낸 실크 스카프를 던지면 스르르 흘러내릴 것 같다. 리어 펜더 상단에 공기흡입구를 과감하게 팠다. 사진으로 봤을 때 도어와 공기흡입구로 이어지는 삼각형 라인이 어색해 보였는데 실제로는 그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아 자연스럽다.

샤크 안테나와 비슷하게 생긴 도어핸들은 에어핀 역할을 한다. 엉덩이는 빵빵하다. 총알 모양의 테일램프와 디퓨저 정중앙에 후방안개등을 달아놔 F1머신의 아우라를 보여준다. 가변형 디퓨저는 F1 머신의 DRS처럼 공기를 잘 다스려 준다.

488 스파이더는 슈퍼카다. 기자의 슈퍼카 기준은 간단하다. 처음 탔을 때 어리둥절해야한다. 나아가 좋은 슈퍼카라면 어리바리한 시간을 길게 가져가지 않게 적당한 직관성을 둔다. 488 스파이더에 앉아 방향지시등을 작동시키고 블루투스를 연결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다.

인테리어는 운전자 중심으로 잘 짜져있고 가죽으로 도배되어 있다. 컵홀더가 하나밖에 없어 동승자는 커피를 들고 있어야 한다. 지갑이나 기타 소지품은 도어에 마련된 수납공간에 넣으면 된다. 버킷시트는 운전자를 잘 지지하고 장거리 주행에도 엉덩이가 쑤시지 않는다.

이렇게 멋진 차를 차고에서 썩히는 것은 중범죄이니 도로 위 출몰 빈도수를 높여야 한다. 지상고가 보통의 스포츠 쿠페 수준이며 리프트 기능까지 탑재되었으니 과속방지턱이나 지하주차장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시야도 넓고 후방카메라까지 있으니 주차하기도 편하다. 이만하면 데일리카로도 손색없는 것이다. 달리고 싶을 때면 마음껏 달릴 수 있다.

극단적인 방향으로 성격이 치우치지 않았다. 과거 페라리에 비해 안정감 있는 것이 재미없어진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페라리를 몰아치면서 달리는 오너를 기자는 본 적이 없다. 차 가격을 생각하면 ‘선비운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다르다. 운전자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아 오히려 공격적으로 가속페달을 밟으면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현시대의 페라리인 것이다.

기자의 첫사랑 예진이 누나와 360 모데나의 핏줄 488 스파이더는 닮은 점이 많았다. 세월이 흘러도 빛나는 외모,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금자탑은 페라리의 모터스포츠 영광으로 빗대어도 좋다. 청순하기만 했던 손예진은 이제 섹시하기까지 하다.

고집스러웠던 페라리는 그 동안 축적한 실력을 과신하지 않으며 인자한 미소로 새로운 페라리 오너를 반긴다. 488 스파이더는 올해 칠순을 맞이하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해 만든 장난감이었다. 운전자의 짓궂은 장난과 응석을 다 받아준다.

488 스파이더와 작별을 할 때 기분이 묘했다. 꿈에 그리던 8기통 미드십 페라리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공허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 택시를 타야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키박스에 키를 꼽아 돌려 엔진을 깨우는 페라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책상에 있던 페라리처럼 꼭 해보고 싶었는데….

그 시절 페라리를 타보지도 않았지만 강산이 한 번하고도 반 정도 바뀌고 있다.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한 것은 8기통 미드십 488은 페라리의 선발이었고 488 스파이더는 에이스였다.

SPECIFICATION

길이×너비×높이 4568×1952×1211mm | 휠베이스 2650mm

무게 1525kg | 엔진형식 8기통 트윈터보, 가솔린 | 배기량 3902cc

최고출력 670ps | 최대토크 77.5kg·m | 변속기 7단 듀얼 클러치

구동방식 RWD | 서스펜션 더블 위시본/멀티링크

타이어 (앞)245/35 R 20, (뒤)305/30 R 20 | 0→시속 100km 3.0초

최고속도 325km/h | 복합연비 8.8km/ℓ

CO₂ 배출량 260.0g/km | 가격 3억8300만원~

488 스파이더에 달린 엔진의 수준은 수상경력으로도 알 수 있다. 2017 올해의 엔진상에서 최고 성능 엔진(Performance Engine) 및 3~4ℓ 배기량(3-litre to 4-litre displacement) 부문과 함께 올해의 엔진 대상(Overall Engine of the Year Award), 3관왕을 차지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대상을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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