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의 모터사이클 산업을 무너뜨린 전두환 이야기

  • 기사입력 2021.11.24 14:14
  • 기자명 모터매거진

자동차 산업은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정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때로는 정책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고,

개선점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야기해도 사실 극적으로 바뀌는 것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이야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다. 오늘 아침, 신문에 실린 뉴스들을 읽어보다가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보고 나니,

착잡하기도 하면서 복잡한 마음이 필자를 흔든다.

전두환은 수많은 과오를 일으키고 떠났는데, 필자는 그 중에서 딱 하나만

짚으려고 한다. 다름이 아닌,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이다. 그 안에서도 처음에는 현대자동차를 새한자동차(현 한국지엠)가 강제로 인수하도록 만들거나(당시 정주영 회장이 현대중공업을 제물로 삼으면서 무산됨) 기아자동차가

승용차를 전혀 만들지 못하게 하는 등, 수많은 비합리적인 일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비극적인 일은 바로 모터사이클 분야에서 일어났다.

기아의 정신은 모터사이클이 넘어가면서 함께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자전거 생산기술을 배운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1944년에 ‘경성정공’을 설립했는데, 해방 이후에도 사업을 계속하다가 6.25 발발과 함께 공장 설비를 뜯어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그는 계속 자전거를 만들다가(그 자전거가 지금도 남아있는 ‘삼천리자전거’의 모태다), 1952년 즈음에 경성정공에서 ‘기아산업㈜’로 상호를 변경하며 본격적으로 기아라는 이름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기아라는 이름이 더 대중화된 것은 조금 뒤에 일이다. 1961년에

일본 혼다와 기술제휴를 맺은 기아산업은 이후 1962년에 혼다 슈퍼커브 C100을 라이선스 생산, 판매하기 시작했다. 발매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있지만, 당시는 5.16 군사정변 때문에 사회가 많이 혼란했기에 제대로 된 기록이 잘 남지 않았으니 여기서는 넘어가자. 꽤 인기를 얻었고 많이 팔렸지만, 수리에 필요한 볼트 너트도 구하기

어려워서 불만도 많았다고 한다.

이 때부터 모터사이클을 본격적으로 만들어 간 기아산업은 1969년, 네이키드 모터사이클인 CL90을 출시했다. 당시 이 모델은 출고 전 예약을 받았었는데, 공급 물량이 부족하다

보니 프리미엄이 붙어 개인 간 예약증을 거래하는 일도 발생했었다. 이후 1970년에 혼다 CB250을 조립 생산하면서 국내에도 대배기량 모터사이클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돈이 많은 사람들은 혼다 CB750을

직접 수입해서 타고 다니기도 했다.

이후 1975년, 기아산업은

한 가지 결단을 내렸다. 모터사이클 부서만 따로 때어내 기아기연(기아

기술연구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1977년에 인천

부평에 공장을 따로 짓고 모터사이클 전문 제조사로 거듭났다. 그리고 1978년에

효성중공업(현 KR 모터스)이

일본 스즈키와 기술제휴를 맺고 국내 모터사이클 시장에 뛰어들었고, 대림자동차공업(현 DNA 모터스)도 일본

야마하와 계약을 맺고(초기에는 혼다가 아니라 야마하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솔라’가 나왔다) 뛰어들었다.

이렇게 되니, 국내 모터사이클 시장이 경쟁 속에서 자연스럽게 커져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 때는 그런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경쟁’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를 단행하며 한 브랜드에 한 종류의 자동차만 몰아주었던 신군부는 이 시점에서 기아기연을 대림자동차공업에 넘기는, 엄청난 패착을 두고 말았다.

당시 기아기연이 모터사이클 산업에서 적자를 보고 있기는 했으나, 문제는

당시 한국의 모터사이클 시장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과 모터사이클 판매가 호황을 이루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1983년 기준 국내 모터사이클 생산대수 171,091대,

국내 모터사이클 보유대수 528,000여대 였으니 당시를 생각하면 큰 시장이었고, 주문 후 몇 주를 기다려야만 모터사이클을 받을 수 있었던 데다가 사전 예약까지 받았을 정도였으니 매력이 넘쳤던

산업이었음에 틀림없다.

만약 기아기연이 규모가 작아서 규모가 큰 대림자동차공업에 넘어갔다면 이해가 갔을 테지만, 당시 이륜차 판매 시장 점유율을 보면 기아기연 약 70%, 효성스즈키

약 20%, 대림자동차공업이 10%를 차지하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봐도 대림자동차공업을 기아기연이 인수하는 게 정상이었는데 반대로 진행되었으니 당시 이와 같은 조치를

두고 ‘정치적 거래가 있었다’는 소문까지도 공공연히 흘러나왔던

것이 당연하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림자동차공업이

진지하게 모터사이클 산업에 매진했다면, 그런 아픈 과거는 옛 추억이라고 넘어가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림은 이후 모터사이클에 진지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1980년대에만 해도 시티100, VF 등으로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준 대림이었지만, 이후의 행보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마도 혼다의 라이선스만 믿고

모터사이클 분야를 소홀히 한 탓이 크리라.

그 실망은 혼다도 느꼈는지, 여러 문제점들을 들어 1996년 즈음에 제휴 단절을 통보하기까지 이르렀다. 대림이 독자 개발한

제품이라고 해야 1980년대 후반, 정부에서 수출전략상품

개발육성자금을 받아 개발한 100cc 정도의 소형 엔진 정도다. 이것조차

실패했다. 같은 시기에 효성이 똑같이 자금을 받아 250cc 엔진을

만들고 개량을 거듭해 나름 최신 모델인 ‘아퀼라’에도 사용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모터사이클에 임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정도다.

필자가 대림의 마지막을 붙잡고 있을 때도 그랬다. 2015년 즈음에

대림에 일이 있어 갔다가, 관계자에게 자동차 부품 산업에 대해서만 잔뜩 듣고 온 기억이 있다. 그래서 “모터사이클 이야기는 안 하시는 것이냐”라고 했더니, 당시에도 “자동차

부품이 70% 이상을 차지하는지라……”라고 말을 흐렸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대림도 아니고 다른 그룹으로 인수된 데다가 중국산 모터사이클이 라인업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애초에 대림이 진지하게 임했다면, 경찰청이 1991년에 도로교통법을 거의 기습적으로 개정해 모터사이클의 자동차 전용도로 통행을 금지하려고 했을 때 어떻게든

이 움직임을 막았을 것이다. 이 때 모터사이클 차단에 성공한 경찰청은 그 뒤로 ‘고속도로 주행 불가는 불합리한 무역장벽’이라는 미국의 주장에도, 유럽의 주장에도 눈과 귀를 닫은 채 배짱을 부리고 있는 중이다. 최근

골을 짚게 만드는 경찰관들의 행동을 보면 그 배짱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한국의 모터사이클 산업과 활성화에 찬물을 거하게 뿌린 것도 모자라 고춧가루까지 대량으로 더해준 전두환은

이제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용서받을 것은 절대로

아니다. 전두환은 모터사이클을 천대함으로써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모터사이클에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아주 중대한 오류 그리고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고 말았다. 이를 돌리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시간을 되돌아가야 한다.

그 험한 고생길을 수 많은 사람들에게 던져 놓고 ‘나는 모른다’는 식으로 골프만 치고 다녔던 사람에게 어찌 조의를 표할 수 있겠는가. 그

덕분에 한국의 모터사이클 산업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한국은 ‘어쩌면

신흥 시장에서 대박이 될 수 있는 먹거리’를 자연스럽게 잃어버렸다. 오늘도

거리를 다니는 수 많은 모터사이클들 중에서 국내 브랜드는 잘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한숨만 나오고

있다.

글 | 유일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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