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개미지옥

  • 기사입력 2020.01.07 10:33
  • 기자명 모터매거진

오랜만에 옛 은사님께 인사를 드리러 찾아뵀다. 대학시절 전공 강의를 해 주시던 교수님은 닛산에서 최신 엔진 개발에 참여하시다 귀국한 젊고 의욕 넘치는 스승이셨다. 삼성자동차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던 터라 당시 삼성이 닛산으로부터 생산 계약을 체결한 VQ 엔진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을 해주셨던 것으로 기억난다.

교과서에 나오는 모든 이상적인 기술이 총 망라되어 있던 엔진. SM525에 탑재되었던 VQ2.5 엔진에 대한 당시 언론의 평가였다. 실제로 VQ는 처음 발매 당시부터 거의 매년 워드의 ‘올해의 10대 엔진상’을 수상해 왔다. 삼성자동차의 SM 시리즈 중 VQ가 탑재된 SM525는 엔진의 성능으로 인해 시장에서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대학원생들과 연구실의 프로젝트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교수님은 요즘도 공식적인 모임에서 내연기관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다니시는 편이다. 필자 역시 전기차 시대가 도래한다고 해서 내연기관의 시장점유율이 급격히 낮아지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경제는 심리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지금 시점에서 내연기관의 장래에 대해 밝은 측면을 얘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당장 부품 공급업체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피스톤이나 커넥팅 로드 등을 생산하는 국내 중견기업들의 경영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시장이 더 확대되지는 못할 터이니 그런 걱정도 일면 이해는 간다. 게다가 국내 기업들의 경우 기본적인 원천기술보다는 응용과 생산기술 측면에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다른 사업으로 응용해 내는 능력이 많이 모자란 편이다.

단순히 피스톤과 커넥팅 로드를 생각해 보면 주조와 단조 기술로 만들어지는데, 그 기술의 수준 자체가 절대 낮지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생산업체들은 그 기술로 그 제품 이외에는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측면으로 확장하는 부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국내 자동차 부품 생산 분야 중 특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야가 주조, 프레스 등인 것으로 보인다. 이윤이 박하기 때문에 작은 외란에도 흔들리는 분야이다. 반면 전장, 소프트웨어는 자동차에서 점점 비중이 커지는 분야이다.

전기차 시대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이러한 트렌드는 거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전기차 붐까지 터져버렸다. 앞서 언급한 심리적 요인에 의해 전기차에 대한 투자는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가속을 받고 있다.

주조나 프레스 산업의 경우 생산자 자신도 수평 확장력이 약하다. 신규 거래처를 확보하기 힘들고, 설비 투자에 큰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데, 이 때문에 인건비와 토지비가 싼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지가 신규 투자처로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한다.

결국 원천기반 기술이 빈약한 생산 위주의 품목은 인건비, 유지비, 경영환경을 따라 철새처럼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경제 현실이라고 본다.

학창 시절 공대 지하실험실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기계들이 고철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기계들이 발전 설비와 방적 설비라는 것을 졸업하고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비단 방적기뿐만 아니라 우리는 시장에서 사라진 기술들을 많이 알고 있다.

일본이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생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밀프레스 업체들을 가지고 있었는가? 이미 우리는 현재의 기술 중 많은 부분을 고철로 변화시키는 격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교수님은 지금 연구실에 가지고 계신 엔진 관련 장비들이 조만간 있을 퇴임 이후 의미 있게 사용될 수 있을지 걱정하셨다. 연구실에 있는 친구들과 얘기를 해 보지만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렇다고 예상되는 미래를 그냥 외면한다면 실험실의 방적기와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개미지옥의 문턱에 서 있는 느낌이다. 새로운 분야로 시야를 넓히되 유행에 휩쓸려 다니지는 말아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 하찮게 보이는 곳에 미래가 있을 확률이 높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그 하찮은 것들을 연결해야만 한다. 운명이다.

글 박준규(자동차 칼럼니스트)

소싯적에는 항공기 마니아였다. 기초과학을 파기 위해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다 자동차에 빠져들어 기계공학으로 전향했다. 한때 자동차 디자인에 심취해 미국 ACCD로 유학을 준비했으나 집안 반대에 부딪혀 결국 국내 자동차회사에서 섀시 설계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자우버에 입사원서를 낼 정도로 모터스포츠에도 관심이 많다. 지금은 자동차 관련 부품 엔지니어링 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취미활동으로 10년 전부터 포뮬러카를 직접 설계·제작해 지인들과 즐기고 있다. 정신적인 지주로 맥라렌 F1을 설계한 고든 머레이를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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