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MAKER 롤스로이스 팬텀

  • 기사입력 2019.12.28 09:00
  • 기자명 모터매거진

EPISODE #1 글 | 유일한

수많은 자동차들이 있고 다양한 브랜드가 존재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롤스로이스는 정말 특별하다.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마주친 순간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Aura)가 다르다. 디자인적으로도 크기로도 하늘 아래 펼쳐져 있는 도로를 움켜쥐고 지배하겠다는 야망을 숨기지 않는다. 이번에는 그러한 롤스로이스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플래그십 세단, 팬텀의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 주군(主君)을 모시기 위해 말이다.

팬텀의 운전석과 마주하는 순간, 문을 열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옷 매무새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만다. 뒷좌석에 탑승하는 사람이 사실은 주군이 아닌데 너무 오버하지 않냐고? 아니다. 옷깃의 마무리, 넥타이의 정확한 위치 등 작은 마무리 하나가 곧 매너이고 그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든 간에 팬텀의 뒷좌석에 탑승한다면 그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주군이 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시트 포지션이 상당히 높기에 승용차이지만 마치 SUV를 탑승한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진다. 고풍스러운 형태의 3 스포크휠은 지름 자체가 크고 림이 상당히 가늘어 손에 쥐는 맛은 없다. 덩치만으로 도로를 지배하는 자동차임에도 불구하고 운전석에서 전방과 측면을 바라보면 시야가 탁 트여 있다는 점이 의외다. 운전은 편안하게 하라는 롤스로이스의 배려이리라. 어느 새 보닛에는 환희의 여신이 솟아올라 있다.

왼쪽에 있는 시동 버튼을 가볍게 눌려12개의 피스톤을 가진 엔진을 깨워본다. 잠에서 깼다는 듯 약간 투덜거리던 엔진은 단 몇 초 내에 잠잠해진다. 최고출력이 571마력에 달한다고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저 나긋이 가속 페달을 달래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팬텀이 알아서 한다. 그리고 유령처럼 소리 없이 도로를 점령한다. 그 순간부터는 달리는 자동차가 아니라 ‘달리는 응접실’이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이 없다면, 운전한다는 감각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만약 당신이 팬텀을 움직이게 한다면, 절대적으로 주의할 것이 있다. 절!대!로! 스티어링을 쥐고 있는 당신을 기준으로 팬텀을 움직이게 하면 안 된다. 만약 그렇게 운전한다면, 스티어링이 제대로 듣지 않고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만다. 그리고 ‘명성에 비해 기본기가 좋지 않은 그저 그런 자동차’라고 인식해 버릴 것이다. 일반적인 자동차라면 그러한 평가도 수용할 수 있겠지만, 이 녀석은 아무에게나 착석을 허락하지 않는 유령이다.

판단의 기준을 바꾸면 움직임이 다르게 느껴진다. 팬텀은 운전석이 아니라 주군이 탑승하는 뒷좌석이 기준이 되는 자동차다. 그래서 뒷좌석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모든 움직임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나긋이 반응하지만 필요할 때는 즉각적으로 힘을 이끌어내는 엔진, 육중한 철문을 열고 닫는 것 같은 도어, 두툼한 형태로 특별한 분의 얼굴을 가려주는 필러 등 모든 것이 주군을 위한 특별함이다.

소리 없이 부드럽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은 주군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연인과 함께하는 자리이다. 묵직한 코치도어를 여는 순간 어느새 냄새를 맡았는지 파파라치들이 카메라를 들고 몰려들기 시작한다. 평범한 세계에서 오래 있었기에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연인은 적잖이 당황한 것 같다. 비는 내리지 않지만, 도어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고 재빠르게 우산을 꺼내 펼친다.

아니, 우산이라고 하면 너무 초라하다. 이것은 적에게서 주군을 지키는 기사의 검이다. 그 검으로 파파라치들의 플래시 공격을 막고, 우아함을 잃지 않고 내릴 수 있도록 다른 손을 내민다. 천천히, 그러나 기민하게 검을 겨누는 방향을 바꿔가며 연인과 주군을 보호한다. 두 분이 무사히 들어가고 나면, 기사는 다시 유령에게로 돌아가고 펼쳤던 검도 다시 고이 접어 제자리로 돌린다. 그들이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기사의 임무를 다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롤스로이스, 그 중에서도 팬텀의 기사가 된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정장이라는 이름의 갑옷을 두르고 우산이라는 이름의 검을 챙긴다. 그리고 말이 아닌 마차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탑승한 주군을 절대적으로 모셔야 한다. 그런 마음가짐을 제대로 갖춘 이에게만 팬텀은 자신의 운전석을 허락할 것이다. 그리고 주군을 모신 후 잠시 푹신한 시트에 앉아 조용함과 함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여유 또한 누릴 수 있다. 현 시대에 다시 태어나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서 말이다.

EPISODE #2 글 | 안진욱

먼저 내 소개를 하겠다. 이름은 밝힐 수 없다. 그냥 한국의 토니 스타크라 생각하면 된다. 탄탄한 지원과 내 영특한 두뇌로 IT 사업을 통해 큰 돈을 벌었다. 정확히 얼마 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생 써도 다 못 쓸 정도로 번 것은 확실하다. 돈도 많이 벌었으니 나의 신분을 보여줄 증표가 필요했다.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롤스로이스 하나 사기로 했다. 그것도 팬텀으로. 우주상에서 바퀴 달린 것 중 최고는 롤스로이스고, 롤스로이스 중 최고는 팬텀이니 내 소비 의도에 딱 맞다. 저기 나에게로 다가오는 팬텀이 내 팬텀이다. 다가오는 모습이 마치 성 같다. 이건 차가 아니라 예술 작품이다.

거대한 파르테논 신전만으로 존재감은 세상을 압도한다. 보라색 물감을 입힌 차체는 화려한 기교를 부리지 않았지만 기품이 흐른다. 차체 옆을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선은 장인이 직접 붓으로 그은 것이다. 자세히 봐도 삐뚤빼뚤 하지 않다. 이런 것만 봐도 왜 이차가 특별한지 알 수 있다. 바퀴가 굴러가도 정자세를 취하고 있는 롤스로이스 배지, 일반 차와 반대 방향으로 열리는 리어 도어, 그 안에 담긴 우산은 나를 근사하게 만들어준다. 일반 도로에서 타는 것이라 내가 직접 성문을 열고 성 안으로 들어간다. 화이트 가죽으로 두른 실내는 넓은 공간을 더욱 광활하게 보이게 한다.

관리하기는 힘들겠지만 청바지 입고 최고급 화이트 가죽 위에 마음껏 앉는 것이 진정한 사치니 기분 좋다. 뒷좌석의 높이는 1열 보다 높다. 때문에 두꺼운 C필러가 측면을 가리고 있지만 전방 시야가 시원해 답답한 느낌은 없다. 시트가 아니라 소파다. 7성급 호텔 스위트룸에 있는 소파보다 조금 더 좋은 정도다. 손으로 만지는 느낌도 좋지만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 있을 만큼 편하다. 당연하겠지만 히팅과 쿨링 기능은 물론 마사지 기능도 갖췄다. 마사지 강도가 그리 강하지 않지만 장시간 몸이 쑤시지 않게 만들기엔 충분한 성능이다. 분명 이유가 있으니까 롤스로이스가 이 정도 강도로 세팅해 놨겠지.

등받이 각도도 눕힐 수 있다. 생각보다 많이 누울 순 없지만 안전상 이유로 이렇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롤스로이스가 아무 이유 없이 하는 것은 없다. 내 차지만 아직 많이 타보진 않았다. 그럼에도 다루기에 어려운 부분은 전혀 없다. 암레스트에 있는 다이얼은 BMW의 것과 같다. 인터페이스 또한 같아 딱히 공부해서 탈 필요가 없다. 어떻게 보면 좋고 어떻게 보면 아쉬운 부분이다. 1열 시트 등받이에 모니터를 숨겨놨는데 이게 아주 유용하다. 이동 중에 언제든지 이 모니터로 여자친구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니까.

지금 여자친구를 데리러 가는 길이다. 오늘은 그녀가 출연하는 드라마 마지막 촬영 날이다. 그 동안 고생을 많이 했기에 오늘만큼은 매니저 대신 내가 데려다 주고 싶었다. 유령처럼 그녀 집에 닿았다. 앞머리에 롤을 말고 부랴부랴 내려오는 모습이 참 귀엽다. 내 눈에는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 주연보다 훨씬 예쁘고 연기도 잘 하는데 왜 주인공으로 섭외가 안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저 바닥의 뭔가가 있겠지 하는 의심을 뒤로 숨기고 여자친구를 맞이한다. 신사답게 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태웠다.

암레스트 뒤에 있는 냉장고에서 아이스 바닐라 라떼와 수국 한 송이를 꺼내 줬다. 세상을 다 가진 천진난만한 꼬마가 따로 없다. 백수 때도 늘 응원해준 여자친구이기에 이런 호사스러운 이동수단은 천사인 그녀가 타야 맞다. 촬영장까지는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밀린 수다나 떤다. 차가 움직인다고 해서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다. 정말 조용하다. 아니 얼마나 고요한지 적막하기까지 하다. 엔진 소음은 물론 바닥에서 올라오는 타이어 소음이 아예 들리지 않는다. 이 무거운 공차중량은 흡음제 때문인 게 분명하다. 창문을 내리고 올리는 것을 반복해보면 얼마나 차음이 잘 되는지 알 수 있다.

그녀가 파우치를 꺼내 화장을 하기 시작한다. 스타일리스트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메이크업을 한다. 한번은 힘들어 보이길래 내가 스타일리스트를 보내줬는데 여자친구가 거절했다. 그래서 지금도 혼자 옷도 구하고 화장도 직접 한다. 아무튼 대화를 이어가면서 노련하게 메이크업에 들어간다. 평소에 타는 페라리에서는 아이라인 그리기가 힘들다고 내 운전 패턴과 내 애마를 혼냈었는데 팬텀에서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흔들림 없는 매트리스는 팬텀을 보고 개발하지 않았을까? 승차감은 최고다. 구름을 타고 하늘을 누비는 느낌이다. 방지턱을 넘더라도 모양새가 빠지지 않고 여자친구는 안정적으로 메이크업을 마무리할 수 있다.

이후 그녀는 대본을 꺼내 옹알거리기 시작한다. 진정한 외조는 이때 멋진 음악을 깔아주는 것이다. 다른 브랜드처럼 오디오 브랜드 배지가 스피커에 붙어 있지 않다. 롤스로이스 시계 역시 시계 브랜드 배지가 없다. 이는 롤스로이스의 모든 파츠는 롤스로이스가 직접 완성한다는 의미와 롤스로이스와 같은 클래스의 브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그 어떠한 스피커 보다 좋은 소리를 들려줘야겠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박효신의 ‘해줄 수 없는 일’을 선택한다. 대본을 보던 그녀의 고개는 나를 향한다. 중저음은 풍부하고 고음은 깔끔하다. 지난 잠실에서 열린 박효신 콘서트의 음향시설 보다 훨씬 좋은 사운드다. 기회가 된다면 박효신을 내 팬텀에 태워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좋아하지 않는 음악으로도 닭살이 돋게 하는 게 팬텀의 오디오 시스템이다.

수다와 메이크업, 그리고 음악에 취하다 보니 차가 막히는 줄도 몰랐다. 운전기사 해피에게 지름길로 빨리 달려달라고 부탁한다. 육중한 덩치는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엄청난 출력을 쏟아내도 뒷좌석의 평화는 깨지지 않는다. 해피 덕분에 촬영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주인공 때문에 기다리던 취재진들이 카메라를 내차 쪽으로 향한다. 괜히 팬텀에서 내리는 모습이 찍힌다면 여자친구 배우 생활에 안 좋을 게 뻔하다. 나와 그녀가 어찌 해야 할지 모를 때 해피가 운전석에서 내려 도어를 연다. 그리고 도어에서 우산을 꺼내어 그녀를 가려준다. 이런 센스 넘치는 해피 같으니라고. 해피의 도움으로 그녀는 촬영장 대기실에 잘 들어갔다.

이제 그녀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해피와 담배 한 대 피우고 방금 전 있었던 일을 어린 시절 무용담처럼 다시 되새겼다. 그리고 나서 차 안에 들어와 남은 그녀의 드라마를 마저 본다. 석양이 질 때 모니터 속 그녀에게 빠졌고 어느새 세상에는 달이 뜨고 내 세상에는 별이 떴다. 서울 하늘에 별 보기는 하늘에 별 따기라지만 난 아니다. 나의 공주,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나와 해피는 성을 지킨다.

글 | 안진욱 & 유일한  사진 | 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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